본문 바로가기

TV동화 행복한 세상

이상한 라면상자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배낭 하나 질끈 매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저… 일자리를 구하는데요."

"일이 없는데."

촌티를 벗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로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가는 곳마다 나이가 어리다, 기술이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열두 번도 넘게 실패한 뒤 배고프고 목마르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탈진해 주저앉아 있을 때, 작은 인쇄소의 구인광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될까? 안 될거야. 그래도 가 보자."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인쇄소를 찾아 갔습니다.

"저… 사람을 구한다고……."

"그 기운에 뭔 일을 할라꼬?"

내 몰골을 보고는 이이고 뭐고 기운부터 차리라며 국밥 그릇을 밀어준 인쇄소 주인 아저씨. 그는 눈 감으면 코 베간다는 서울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천사였습니다.

나는 인쇄소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먹고 자며 일을 배웠습니다.

실수도 하고 고달플 때도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뒤 첫 월급을 타게 됐습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난생 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이라 감개무량했습니다.

나는 수중에 라면 한 상자값만 남기고 그 돈을 몽땅 저금했습니다.

고정불변의 저녁 메뉴 라면!

나는 배가 고플 때면 저금통장을 꺼내봤습니다. 통장에 불어난 돈을 보며 라면만 먹어도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렇다고 저녁을 굶을 수는 없기에 그날도 라면 하나를 축냈습니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습니다.

"어, 이상하다?"

하나만 남아 있어야 할 라면이 두 개였던 것입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라면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비밀의 열쇠는 주인 아저씨 손에 있었습니다.

"박군아, 이거말이다. 저 삼거리빌딩 있지? 관리실에 갔다 줘라."

아저씨는 저녁 무렵 일부러 심부름을 시키고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상자에 라면을 채워 넣으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고학생의 자존심이 다칠 것을 염려해 몰래몰래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깊은 사랑과 마술상자 속 라면이 있어 내 젊은날은 초라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깔개를 터는 남자  (0) 2010.07.29
찌그러진 만년필  (0) 2010.07.28
1006개의 동전  (0) 2010.07.26
고마움을 그린다  (0) 2010.07.25
도시락 속의 머리카락  (0) 2010.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