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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동화 행복한 세상

지워지지 않는 낙서

지난 봄, 우리 가족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물이 있고 풋대추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대추나무가 서 있는 그런 집으로 말입니다. 셋방을 전전하던 끝에 처음으로 장만한 내 집이라서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들떠 있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 딸 때문에 언제나 주인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귀에 달고 살아야 했던 엄마가 누구보다도 좋아했습니다. 이삿짐을 풀자마자 내게 주어진 일은 담장 가득한 낙서를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서툰 글씨, 어딘지 모를 주소, 약도…….

나는 깊고 아득한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낙서를 말끔히 지웠습니다.

"아, 다 지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비비고 나와 보니 내가 애써 지운 글씨들이 모든 되살아나 있었던 것입니다.

"어? 이상하다. 도깨비가 왔다 갔나? 아니면 달빛에 글씨가 살아나는 요술담장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려 낙서를 다 지우고 엄마한테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깨끗하게 잘 지웠네… 우리 착한 딸."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일어났습니다. 누군가 어제와 똑같은 낙서를 가득 해놓은 것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나는 낙서를 지우면서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을 내 주리라 마음먹고 저녁내내 망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두 소년의 그림자가 담장에 어른거렸습니다. 범인이 분명했습니다.

"형!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이거 보고 이사간 집 찾아올거라고 그랬지?"

"물론이지, 아빠는 집배원이었으니까 금방 찾아올실 거야."

형제는 하늘나라로 간 아버지가 이사간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담장 가득 약도를 그리고 또 그렸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이후 낙서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집 담장엔 그 삐뚤삐뚤한 낙서가 선명하게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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